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평양 전쟁/배경 (문단 편집) == 일본의 중국 침략에 따른 국제사회의 압력 == 중국에 대한 [[만주사변|계속]][[1차 상하이 사변|된]] [[러허 사변|침략]]으로 가뜩이나 안 좋은 시선을 받던 일본은 [[난징 대학살]] 등 온갖 [[전쟁범죄]]에 앞장선 결과, 국제적인 압력을 받는다. 무엇보다도 거대한 영토와 인구와 각종 자원이 풍부한 중국은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가진 최대의 소비시장으로 모든 서구 열강이 아시아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지역이다.[* 18세기 이래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모든 서구 강대국들의 아시아 정책에서 제 1순위는 중국 시장에서의 자국의 영향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중국으로의 접근로 혹은 중국에서 밀려났을 경우에 견제를 위한 근거지로 2순위이다. 이는 과거부터 지금 까지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다.] 중일전쟁 이전까지는 만주 지역에서 러시아 제국을 저지하며 일본이 만주의 이권을 얻고 중국 시장에서 영국이나 미국 독일 등이 이득을 보는 식으로 상생관계가 이어졌으나, 일본이 만주를 획득한 후 중국으로 손을 뻗으며 이런 관계에 금이 생겼고 중일전쟁으로 깨지고 만 것이다. 상징적으로 당시 중국에서 가장 번성했던 [[상하이]]는 영국, 미국, 프랑스 자본이 수십년 동안 막대한 돈을 투자해서 개발한 지역이었는데 일본군이 여길 박살을 내버렸다. 또한 일본군은 국민당의 주요 무기 수입처인 [[https://ko.wikipedia.org/wiki/버마_로드|버마 로드]]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봉쇄하기 위해 무리하게 [[하이난]] 섬을 공격했고 중불국경을 폭격함으로 프랑스의 재산과 인명 손실까지 야기하여 영불의 어그로를 끌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 3공화국은 크게 화를 내며 일본의 압력 때문에 설정했던 대중국 무기 수출 제한을 풀어버렸고 중불국경에 대한 방비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일본과 영국, 미국의 사이가 틀어지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영국이 중국의 항전을 지원한다는 말이 일본 내에서 나돌며 반영감정이 솟아났다. 이를 시작으로 텐진에서 영국 조계를 포위한 채 통행하는 영국인을 일본 군인이 옷을 벗기며 수색함이 드러나자 영국 내에서도 반일감정이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영국은 [[뮌헨 협정|독일이 체코를 합병하는 상태]]에서 시시한 문제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고, 일본이 제안하는 모든 항목을 수락하며 중국에 대한 어떠한 원조도 하지 않겠다는 조약을 맺고서 이는 일단락 되는듯 했다. 하지만 중일전쟁이 진행되며 해안지역을 일본이 점령하는 등 일본의 승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영,프,미는 자국의 시장 점유를 사수하기 위해 경제차관이나 무기 판매 등 여러 방법으로 중국 지원을 늘리고 있었다. 반면 일본 입장에서는 중국이 당장 항복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니 전쟁을 끝낼 수도 없고, 그런데도 중국이 항복하지 않고 전쟁이 장기전으로 흘러가며 경제재제, 전략자원의 수출 금지 등 답답한 상황이 지속되자 이를 타개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허나 이는 미봉책에 지나지 않아 영국 내에서의 반일감정은 그래도 수그러들지 않았고, 무역전초기지로서 필리핀과 기한적 식민지 계약을 맺으며 중국시장에 자본을 투입했던 미국에서도 일본의 침략으로 중국의 시장이 파괴되자 반일감정이 악화되기 시작한다. (일본도 똑같이 반영감정이 수그러 들지 않았다.) 그로 인해 미국과 일본이 1911년 이래 유지해왔던 미일통상항해조약에 대해 1939년 조약을 연장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미국에서 밝혀 왔다. 그리고 국교조정회담에서 일본이 중국을 침공함으로써 미국 경제에 막대한 피해를 주고 있다는 입장을 밝힌다. 이에 대해 일본에서는 강경한 반발 입장을 유지했고 1940년을 기해 미일통상항해조약은 해지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